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근/지도자 경력 (문단 편집) === 마지막 불꽃을 불태운 LG 트로이카와 조인성, 박용택의 발굴 === 김성근 감독이 지휘를 맡게 되면 번트 위주의 스몰볼 야구로 타자들 성적이 급감한다는 평가가 있는데, 적어도 LG 시절은 결코 그와 맞지 않았다. 특히 이 당시 크게 활약했던 선수는 1994년 신인 시절부터 LG를 이끌어온 유지현, 김재현, 서용빈 3인방. 당시 [[서용빈]]은 교통사고로 인한 부상과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연이은 사건사고로 오랜 공백 끝에 커리어가 크게 망가진 이후였다. 심지어 바로 전인 2000년 선수단 무단 이탈 사태를 일으키며 감독과 구단에 찍히는 등 커리어가 망가질 위기였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서용빈을 1루에 붙박이 고정시키고 주장까지 임명하는 등 신뢰를 보냈으며, 그 결과 군 입대 직전인 2001~2002년 두 시즌 동안은 전성기 만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활약은 했었다. ||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2092601001785200147245.jpg]] || 김재현 또한 돌글러브로 유명한 선수였음에도, 공격력 강화라는 핑계 아래 어정쩡한 우익수 수비를 맡으며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를 수비 부담이 적은 좌익수에 고정시킨 것 또한 김성근의 업적. 심지어 난데없는 희귀병으로 선수 생명이 끝날 위기에서도 김성근은 그를 지명타자로 고정시키며 끝까지 신뢰하였다. 그 결과 대구에서 열린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2루타성 타격을 하고 타점을 올리면서도 절뚝거리면서 1루로 간신히 걸어나가 팬들을 감동시킨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추억도 있고 해서 김재현과 김성근의 사제 관계는 굉장히 돈독한 편이었으나, 후에 SK에서 만났을 때는 플래툰 기용 문제로 굉장히 악화되기도 하였다. 김재현 스스로도 김성근 감독은 자신에게 시련과 영광을 준 분이라며 애증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0/24/2010102400526.html|#]]] 유지현도 김성근 감독 시기 커리어하이를 기록했다. 이는 2루수 컨버젼의 성공이 컸는데, 김성근 감독이 2001년부터 무명이었던 권용관을 기용하면서 2루수-유격수를 보기 번갈아 보기 시작했고 팔꿈치 수술로 시즌을 늦게 시작한 2002년에는 권용관이 주전 유격수를 맡는 대신 완전히 2루수로 전향해 3할 1푼의 타율을 기록함과 동시에 여전히 준수한 리드오프 역할을 수행하며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이 나가자마자 2003년 급격한 하락세를 맞았고, 1994년부터의 은사 이광환 감독이 이 슬럼프를 고쳐보려 했으나 이광환마저 2군 감독으로 경질, 이순철에 의해 강제로 은퇴당했다. 이들 트로이카는 김성근 감독 경질 후 몇년 만에 팀 분위기 쇄신이란 명목 아래 말 그대로 숙청당했다. 김재현은 기껏 고관절을 치료하고 왔더니 2004년 FA 협상에서 구단으로부터 경기 중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도 구단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각서를 요구받자 그에 분노하여 SK로 이적하였고, 유지현은 전술한 대로 이순철에 의해 강제 은퇴당했다. 서용빈은 군에서 복귀한 후 사실상 전력 외로 분류되었고, 2005년 은퇴하였다. 신바람 야구를 이끌던 3인방이 사실상 마지막으로 같이 활약한 시기가 관리야구의 대명사였던 김성근 감독 시기였던 건 시대의 아이러니. [[조인성(야구)|조인성]]이 주전으로 발돋움한 것도 김성근 시대의 산물이었다. 1998년 데뷔한 조인성은 2000-2001년까지는 김정민, 장재중과 같이 플래툰으로 뛰었으나, 2002년 김성근 감독 휘하에서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투수 리드에서는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당시 김성근 감독 본인이 투수 리드 등을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는 코멘트들이 자주 기사화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 비판이 부각된 건 이순철 시대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점.] 블로킹이나 도루저지에서 강점을 보였고, 하위타선의 뇌관 역할을 잘 수행했다. 김성근 시기 LG에서 가장 주목받은 선수는 역시 [[박용택]]이었다. 박용택의 커리어에서 김성근 감독은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고려대 졸업 후 박용택은 계약금 2억 3천만 원 + 연봉 2천만 원으로 총 2억 5천만 원으로 계약할 계획이었으나 그 당시 타자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있던 이현곤, 김민우가 더 높은 액수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박용택이 자기 몸값을 더 높게 쳐달라고 항의하자 구단 측에서 그럼 계약하지 말고 마무리 캠프에 가서 김성근 감독한테 인정받고 오라고 한 것. 김성근 감독에 대해 잘 몰랐던 박용택은 거리낌없이 구단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구단은 김성근 감독이 신인들, 고졸 선수들을 선수로도 생각을 안 한다고 만약에 선수로 인정을 받지 못하면 2천만 원, 3천만 원으로 계약을 할 수도 있다며 겁을 줬지만 박용택은 끄떡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약하지 않은 채로 석 달을 지옥 훈련했다. 그러자 김성근 감독이 박용택에게 "야! 너 왜 계약 안 해?"라며 물어봤고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자 김성근 감독은 박용택을 주전 감으로 인정해 구단과 계약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박용택은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MVP까지 차지하는 맹활약을 펼쳤고, 덕분에 그동안 번번히 준플이나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김성근은 프로감독생활 18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 둘의 관계는 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입단 직후 박용택은 하루에 송구를 500개씩 던지라는 김성근의 훈련 방식에 이의를 제기했다가 2군에서 시즌을 시작하였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박용택을 두고 이병규와 김재현의 대를 이을 만한 타자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으나, 마음이 여린 점을 문제 삼았다. 문제는 이 500개 송구 훈련 과정에서 박용택의 부상이 심해졌고, 이후 이 어깨 부상이 발목을 잡으면서 소위 소녀어깨로 전락했다는 것. 다만 당시 박용택이 엉뚱한 부분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2002년 시즌 후반에 세면대에서 난데없이 팔굽혀펴기를 하다 세면대를 부숴먹고 손바닥이 찢어지며 순위 싸움을 하던 후반에 결장한 것. 이 때문에 김성근 감독에게 크게 질책받는 등 혼나는 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